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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규봉과 망부석
구분 민속/전설
내용 규봉과 망부석

「여보게 망부석을 또 세운대 큰일났구만」

「아니 그뿐인줄 아나 쓰러져 있는 망부석이 얼마나 되는데 왜 그걸 아직 안치우지」

지금의 주산면 화평리 화산 마을의 뒷산에 망부석이 소에 실려와서 많이 부러졌다. 더구나 명문집안의 묘터가 있는 자리이니 아무도 탓하고 나설 사람도 없다.
하기야 남포현감(藍浦縣監)도 실려오는 망부석을 보고서 크게 절하는 판국이니 백성들이야 뭐라고 탓하랴!

이조 초엽의 이야기다. 규봉이 보이는 곳에 한 사람이 묘를 썼었다. 묘를 쓰고 장자의 집이었으므로 망부석 두 개를 세웠었다.가난하게 살다가 노다지 금덩어리를 캐서 부자가 되어 잘살게 되자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아들은 아버지 묘를 호화롭게 해주기 위해서 좌대를 마련했고 망부석를 마련했다. 그 망부석을 세우고 집에 돌아오자 초상집에는 큰 화제나 생긴듯이(선돌)에 사는 한 아가씨가 집을 뛰쳐나갔다고들 쑤군거리고 있었다. 하기야 처음은 묘에 망부석을 세운 것이 아가씨가 집을 뛰쳐 나간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귀담아 듣지도 않고 그냥 흘려 보냈었다. 그후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아버지 묘곁에 묘 를 쓰고 망부석을 세우기 위해 멀리서 운반해 왔었다. 그리곤 막상 망부석을 세우려는데 마을사람들 이야기가 여자의 무덤엔 망부석을 세우지 않는것이라고 말하므로 망부석을 세우지 않고 그냥 자리에 눕혀 놓았었다.
망부석이 도착하고 세우기위해 일꾼들을 사서 모았다가 망부석을 세우면 안된다는 말을 듣고 그냥 한쪽에 눕혀놓고 내려 오던날 (화산) 마을에 사는 한 도령이 집을 뛰쳐나갔다고 했다. 그때까지만하여도 마을사 람들은 망부석과 연관시키지를 않았다.
그후 화산마을 뒷산 화왕봉이 명당자리라고 한 양반집안에서 묘를 쓰기 시작했다.

명문의 집안이었던지 묘는 크게 썼고 장사날엔 이 근처 고을 원님들만도 다섯 여섯 떼를 지어 모이는 것을 보면 큰 세도가의 집안 인양 싶었다. 이곳에 큰 묘지가 생기면서 망부석이 자주 세워졌다. 헌데 망부석을 세울때마다 (화산)마을 총각들은 한사람 두사람씩 마을을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예감이 이상해서 산에 올라 서자 망부석 두 개를 쓰러뜨렸다. 망부석 두 개를 쓰러뜨리자 선돌에서 색씨 두사람이 마을을 뛰쳐 나갔다고 야단들이었다. 그후에도 세도가인 묘지의 주인은 집안 사람이 죽을때마다 이곳에 묘를 썼고 망부석을 세웠다.
망부석을 세우자 화산마을에서는 두사람이 또 자취도 없이 마을을 뛰쳐 나갔다. 화산마을에서 이런 불행을 당하다가 마을사람들의 호소를 하기위해 덕이 많고 고을 원님과 친하다는 한 노인을 (남포) 찾아가서 현 감께 자세한 설명을 하여 묘는 쓰되 망부석은 세우지 말도록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허나 고을 원님은 자기 힘으로 어쩔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그 후에도 묘는 썼었고 망부석은 세워졌다. 망부석이 설때마다 여전히 (화산) 부락에선 불행이 닥쳐 왔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쩐 일인지 나라의 군사들이 산골짜기로 몰려오더니 묘를 파헤치며 망부석을 마구 때려 부섰다. 망부석은 두동강이 세동강이를 내서 어데론가 싣고갔다. 또한 부서진 망부석을 땅에 쓰러뜨리고 파묻었다. 그리고선 (화산)과 (선돌)마을에서 마을을 뛰쳐나가는 총각도 색씨도 없었다 한다.
이 자리에 크게 묘자리를 잡았던 가문은 고성이씨의 가문이었다. 인조반정의 공신 이괄이가 그후 난을 일으켜 역적으로 몰렸으므로 묘를 파헤치고 망부석을 때려 부셨다 한다.

묘와 망부석을 없앤 후 고성이씨들 의 후손들도 이곳 가까이와서 성묘를 하고 가면 모두 죽는다 해서 삼곡리 월현(月峴) 고개에서 절을하고간다는데 규봉(窺峰)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묘를 쓰면 악운이 돌아온다는 풍수설이 너무나 들어맞는 이야기 로 통해서 그리 예를 올린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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